1998. 9. 16
인간의 기준과 욕망에 의해 아름다운 생명이 사라져가고 있다.
지금은 잊혀진 조각들.나 어렸을 적에는 화분의 꽃보다 들판의 꽃을 좋아했어. 사라져 잃어버리면 다시는 못 찾을 것 같대.
많은 사람이 꽃을 좋아하지만 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잊은 것 아닐까.나, 여태까지 여위었던 삶 속에서 잃어버린 들꽃 같은 마음을 다시 찾아 사람들 쪽으로 달려간다.
처음으로 1998.9.16 ‘생명의 축제’에서
- 뒷담 – 미술을 시작하면서 꽃에 대한 시각도 많이 달라졌어사람이 인위적으로 키운 정원이나 화분의 꽃보다 들판의 야생화에 더 관심을 갖게 됐고, 들판이나 산, 그리고 길가의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은 꽃조차 거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됐다.
작은 ‘냉이꽃’과 ‘달개비’에도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내 꽃에 대한 미학적 관점의 변화다.
이들을 수채화에 담으려고 애도를 표하며 그림 실력이 부족한 표현의 미숙함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뒤늦게 사진에 빠져 들꽃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나는 사진도 미술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 생명미술 최초로 그린 ‘야생화 달팽이’ 수채화
혹한을 견딘 은근과 끈기의 코끼리 징 ‘인동초’
쯔육사(쯔유쿠사)
17. 소의 단상 1998.9.16
소라고는 음식으로만 보이는 것 같다.
소꼬리, 등심, 갈비, 꼬리곰탕 등등…
옛날 마을 사람들은 소에게 풀을 뜯기고 볏짚을 썰고 콩깍지를 넣어 쇳죽을 쑤어 주었다.
어루만지기도 하고, 밭을 갈기도 하고, 짐을 나르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이랴!
이랴!
워이!
와이!
이놈의 소가….. 노을 황소의 멍멍이 풍경 소리가 그립다.
농부가 황희정 스님에게 귓속말로.기미가 누렁이 정도는 아니에요.
늙어서 기운이 다하자 그때 잡아먹었다.
소를 정말 사랑했는데.
우리가 지금 잃어버린 것은? 그리고 잊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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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1998.9.16 ‘생명의 축제’에서
- 지금 느낌 – 좁은 공간에서 인간을 위해 죽음만을 기다리는 소가 슬퍼!
- 소를 생각하면서 연필화로 드로잉한 삽화 <소의 단상>
18. 향수 2000.6.11
이른 아침 협궤 위로 미니열차가 굉음과 함께 기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게으른 아이의 선잠을 깨운 그 기차는 내 시계였다.
이제는 흔적조차 사라진 애틋한 나의 향수!
첫 번째 2000년 6월 11일 저녁 원주 집에서 고향 추억의 그림자
- 뒷담 – (2019년 2월 12일)
- 협궤열차 수여선은 1930년 개통된 수원-용인-이천-여주 간을 운행했다.
지금은 용인대도시 개발로 1972년 철거, 지금은 흔적도 없다.
나는 어린 시절 용인군 용인면 김량장리 철도변 초가집 아침 7시 열차는 수원에 유학 간 농촌 중고교생들의 통학열차였다.
나와 다른 형제도 수원으로 유학을 갔다. - 당시 시계는 희귀하고 귀한 것이어서 시계가 없는 가정도 많았다.
시계추가 좌우로 왔다갔다하면서 둥근 유리뚜껑을 열면 시계 태엽을 감을 구멍이 있어 열쇠처럼 생긴 열쇠를 구멍에 넣고 오른쪽으로 멈출 때까지 계속 돌리고 태엽 태엽을 감으면 이틀 동안 시계 바늘이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옛날 시계는 오차도 커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정시에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삐삐 소리에 맞춰 바늘을 조정해 주곤 했다.
이건 대부분 내 몫이었어.그리고 새벽에 우리 집 옆을 지날 때 울리는 기적소리가 아침 7시경이어서 시계가 많이 어긋난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나는 게으름뱅이였지만, 자주 기차의 기적소리에 깨우곤 했다.
사실 나의 형제자매 4명은 수원으로 통학했기 때문에 6시경에 일어나 등교할 준비를 했고, 어머니는 아이들의 아침밥과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새벽 5시경에 일어나 큰 시중을 들었다.
이것은 엄마의 이마의 주름을 하나 더 새겨주는 슬픈 이야기지만…. - 교회 장로였던 아버지는 자식들의 교육에 무관심했지만 문맹이었던 어머니와 나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 가난하고 어려운 우리 집이 앞으로 잘살 수 있다는 확고한 마음으로 고향 용인보다는 더 나은 수원중등학교에 보냈고 이를 어머니와 내가 아버지를 설득해 이룬 대신 나와 아버지의 약조가 있었다.
무신론자였던 내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봉사했고 아버지의 가업인 장사를 열심히 도와야 했다.
그래서 나만 고향 시골 학교에 다녀야 했다.
훗날 형제자매가 성공하면 내가 뒤지더라도 서로 돕고 잘 살려야겠다는 희망을 안고 내가 희생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었다.
먼 훗날 이건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았지만. - 자식 때문에 한없는 어머니의 모성애 그리고 형제자매의 사랑이 아련히 떠오른다 아!
옛날이여~
고향의 철로길 개울 그림을 수채화로~
19. 얼음꽃 2001.4.27
밤새도록 눈비바람에 철탑이 쇳소리를 내며 서럽게 울었다.
추위와 외로움에 채찍질을 당해 너무 슬퍼서 울었다.
새벽 산허리에 반쯤 비친 차가운 햇살에 눈시울이 어렸다.
밤새도록 울부짖고는 오다가 꽃을 피웠다.
가지 끝에 펼쳐진 햇살을 띤 오색 수정 열매에서 작은 요정들이 뛰어나와 운해 위를 미끄러지듯 날아간다.
추위에 지고 해님을 향해 사라져가는 귀여운 요정들을 상상해본다.
황홀함에 넋을 잃은 내 영혼이 얼어붙는 줄도 모른 채.
이 신비와 기쁨으로 내가 살아 있는 것이 경이롭다.
2001년 4월 27일 태기산의 겨울 해돋이와 운해를 떠올리며
‘미망’과 ‘회상’ (2019년 2월 12일 원주 세경아파트 자택)
1986년부터 2000년까지 14년간 강원 횡성군 둔내면 태기산(표고 1,261m)에 있는 KBS TV 중계소에 재직했다.
전파로 방송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기술직에 종사하다가 60세에 은퇴한 통근이 어려워 대개 격주로 교대했지만 비밀번호를 6일간 쉴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그곳에 오래 있었다.
겨울 교체는 눈이 쌓여 무릎 위까지 차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추억이 많이 담긴 곳이다.
교대가 힘들어 당일 내려오지 못하고 아침 일찍 하산하는 정상 부근에서 오대산 쪽으로 운해가 펼쳐져 있고 산허리로 해가 뜨면서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4월인데도 관목가지에 밤새 눈비바람에 희미하게 꽃을 피워 신비로운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적이 있다.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그때는 사진과 거리가 멀어서 아쉬워요.
아래 사진은 당시 내가 태기산 기슭에서 보았던 것과 거의 비슷하다.
눈과 백설기의 추억 2006.3.1 오늘 아침처럼 눈가루를 뿌리면 1950년대 초겨울 어느 날 배고팠던 어릴 적 시절이 생각납니다.
어머니가 굽은 쌀을 물에 담가 불려서 건지면 방앗간에서 하얀 가루로 건져옵니다.
이름하여 하얀 떡가루!
!
이것을 찜통에 찌면 백설기라고 합니다.
순백의 순결이 배어, 군데군데에 검은콩을 박았어요.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군침을 흘리고, 어머니를 올려다보고, 떡이 되기를 기다렸고, 이것이 제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습니다.
밖에는 밤새 내리던 눈으로 검은 독이 든 장독대… 저녁에는 떡이 다 만들어질 무렵 하얀 눈가루를 뿌렸답니다.
저 눈이 다 떡가루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2006년 3월 1일 원주 집에서 지금의 고향 모습은 – 2018년 말미에 그때까지도 내 고향 용인은 농촌 시골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이 사진도 위의 글보다 22년 뒤의 것이니 1950년대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당시 용인 인구는 5만 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현재(2018년) 용인시는 3개 구에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옛날 어린 시절의 가난과 배고픔의 세월은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희미한 먹거리의 아름다운 미망의 추억이기도 하다.
1972년 용인 시대의 오래된 흑백 사진